고성능 그래픽 메모리 라이벌전, HBM vs GDDR5X
2016.02.16 09:41:45
[미디어잇 최용석] PC로 게임을 즐기는 데 필수장치로 꼽히는 그래픽카드 시장은 주로 GPU를 중심으로 움직여왔다. CPU에 따라 PC의 기본적인 성능이 결정되는 것처럼 그래픽카드 역시 GPU에 따라 기능과 성능 등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모처럼 GPU가 아닌 그래픽카드용 메모리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새롭게 도입될 차세대 그래픽 메모리 2종이 서로 정면 대결을 펼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픽카드의 핵심 부품인 GPU의 단순 연산 처리 성능은 CPU를 웃돌고 있다. 실제 일부 고성능 GPU의 연산 성능을 빌려와 CPU의 연산을 보조하는 ‘GPGPU’ 기술은 이미 업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GPU가 CPU 이상의 처리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데이터가 머무는 그래픽 메모리의 성능도 좋아야 한다. 현재는 GDDR5 메모리가 주력이지만, 그 뒤를 이을 차세대 메모리로 HBM과 GDDDR5X가 꼽히고 있다.
이 두 차세대 메모리는 작동 방식이나 구조, 그로 인한 장단점이 상반되어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아닌 만큼 두 차세대 메모리의 대결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차세대 고성능 그래픽메모리의 시작을 끊은 HBM
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은 이름 그대로 기존 그래픽 메모리의 대역폭을 몇 배 이상 끌어 올림으로써 데이터 처리 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인 메모리다.
HBM을 고속도로에 비유하면 최대 차선 수를 기존의 수배로 넓힌 것과 같다. 동시에 더 많은 데이터를 주고받게 되면 기존 메모리 대비 수배 이상 높은 대역폭을 얻을 수 있고, 그만큼 그래픽카드의 전체 성능이 향상된다는 단순한 원리다.
실제로 업계 최초로 HBM 메모리를 채택한 AMD의 라데온 ‘퓨리(Fury)’ 시리즈 그래픽카드는 메모리 용량이 4GB에 불과하지만 수배에 달하는 메모리 대역폭을 바탕으로 같은 용량의 GDDR5 메모리를 사용한 그래픽카드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을 발휘한다. 특히 그래픽 메모리 성능이 중요한 2K/4K급 고해상도 환경에서 성능 저하의 폭이 훨씬 적은 것이 장점이다.
또한 높은 대역폭을 확보하기 위해 2.5D 적층 구조를 사용해 그래픽 메모리와 GPU를 밀착시켜 하나의 패키지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기존 메모리 모듈이 차지하는 공간을 없앰으로써 그래픽카드 전체의 크기를 기존의 70%~50% 수준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불필요한 데이터 신호 이동 경로를 최대한 줄임으로써 전력 효율도 크게 향상됐다.
여기에 1세대 HBM 메모리를 처음 상용화한 하이닉스와 조금 늦게 HBM 시장에 뛰어든 삼성전자는 1세대보다 성능이 2배가량 향상된 2세대 HBM의 본격 양산을 앞두고 있다. 업계에서는 빠르면 올여름에 2세대 HBM을 탑재한 차세대 그래픽카드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HBM도 단점이 있다. HBM은 메모리와 GPU를 ‘인터포저(interposer)’라는 일종의 중간 기판에 같이 올려서 하나의 패키지로 만든 구조로 되어 있다. PCB 기판에 GPU와 메모리를 직접 올리는 기존 그래픽카드와 다르게 추가 패키징 과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제조 공정이 복잡해지고, 비용도 상승한다. 게다가 서로 다른 반도체를 하나로 묶는 만큼 수율도 크게 떨어진다.
AMD의 퓨리 시리즈는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제조 공정과 그로 인한 낮은 수율로 인해 출시 이후 계속 품귀 현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비싼 가격까지 더해지면서 시장에서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2세대 HBM이 가장 극복해야 할 과제도 바로 수율이다.
‘온고지신’을 바탕으로 복병처럼 등장한 GDDR5X
GDDR5X는 업계의 시선이 HBM에 쏠린 가운데 등장한 복병과도 같은 제품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GDDR5X는 이미 그래픽카드에서 널리 쓰이는 GDDR5를 개선한 제품이다. 지난 1월 메모리 표준 기술을 관장하는 JEDEC(Joint Electron Device Engineering Council,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이 표준안을 결정한 GDDR5X는 최대 대역폭이 기존 GDDR5의 약 2배다.
최근 미국의 마이크론이 GDDR5X 메모리의 양산 계획을 발표했다. 시제품의 성능(전송률)은 13Gb/s 이상으로, 이는 표준안 최대 성능인 14Gb/s에 육박하는 수준이자 1세대 HBM보다도 빠른 성능이다. 양산 시기도 올해 여름으로 상당히 이르다.
무엇보다 GDDR5X의 장점은 ‘가격’이다. 기존 GDDR5와 기술적인 기반이 같으므로 생산 설비와 기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상용화된 지 오래된 GDDR5 제조설비는 그만큼 안정되어 있으므로 이를 GDDR5X로 전환하더라도 상당히 안정적인 수율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패키지 자체도 기존과 거의 같으므로 실제로 GPU를 공급받아 그래픽카드를 만드는 제조사들의 부담도 훨씬 적다. 새로운 메모리에 맞춰 기본 설계를 크게 바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GDDR5의 약점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우선 기존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기판 공간이 필요하므로 그래픽카드의 크기를 줄이기 어렵다. 최근 들어 고성능 PC의 크기가 작아지는 추세에서 불리한 요소다.
또 성능이 향상되면서 소비전력 대비 효율도 자연스레 올랐지만, 이는 전체적인 소비전력이 줄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성능이 오른 만큼 소비전력과 발열이 도리어 늘어날 수도 있다. 발열이 늘어나면 더욱 안정적인 냉각 솔루션이 필요하고, 그래픽카드의 크기도 더욱 커지게 된다.
결정적으로 2세대까지 나온 HBM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 약점이다. 사실 HBM이 개발된 근본적인 이유는 4K나 VR(가상현실)의 도입으로 급증한 그래픽 데이터를 더욱 빠르게 막힘 없이 처리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GDDR5X가 기존 대비 향상된 성능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HBM 이상의 ‘최상급 화질과 퍼포먼스’에는 미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이제 막 시작된 차세대 그래픽 메모리 대결
일단 올해 출시될 차세대 그래픽카드는 2세대 HBM과 GDDR5X 모두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타협 없는 고성능을 요구하는 고가의 하이엔드 그래픽카드는 HBM을, ‘가격 대비 성능’을 추구하는 퍼포먼스급 이하 그래픽카드는 GDDR5X를 채택할 전망이다.
하지만 두 차세대 그래픽 메모리의 대결은 이제 시작이다. 성능이나 가성비보다 기선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그래픽카드 시장은 차세대 GPU뿐만 아니라 차세대 그래픽 메모리의 대결이라는 또 다른 볼거리가 생긴 셈이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